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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Activities

[언론] 난민혐오대응: 월간 언론 모니터링 2020년 6월

난민혐오대응워킹그룹 월간 언론 모니터링 no.5 <2020년 6월>

1. 들어가며

1) 관찰의 범위

이글은 6월 동안 한국 언론이 난민에 대해/난민과 관련하여 보도(관찰)한 내용들(이하 ‘언론의 난민보도’)을 관찰한 결과다. 모든 기사들을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6.1일부터 6.30일까지 각 매체들에서 주요하게 다뤄진 기사들은 ‘빠짐없이’ 살피기 위해 노력했다. 주로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매일경제, 한국경제, 연합뉴스, 한국일보 등의 기사를 중심으로 관찰했으며, 관찰자가 유의미하다고 판단한 경우 그 외의 매체에 대해서도 관찰을 진행했다.

2) 관찰의 지향

이글이 추구하는 관찰은 “자기(의미)에 준거하여 진행되는 구별과 그에 따른 지칭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찰자는 1차적으로, 그동안 난민인권운동이 견지해온 의미(경계)들에 준거해 ‘언론의 난민보도(관찰)’들을 범주화 및 기술-비판하려했고, 2차적으로는, 기존 관찰들에서 다뤄지지 않은 의미/경계들을 관찰에 도입하고, 이를 향후 관찰을 위한 준거의 일부분으로 제안하고자 했다(물론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다음 관찰들의 수용여부에 달렸지만). 즉 이글의 관찰은 기존 관찰들에 대한 ‘관찰’이면서, 동시에 향후 관찰들의 ‘대상’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3) 관찰(시점)의 특정성

‘언론의 난민보도’와 관련하여 2020년 6월은 (1)장기 코로나19의 상황 속에서 난민들의 ‘곤경’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시간성 및 (2)1년에 한번 있는 세계 난민의 날(20일)을 포함한 달이라는 점에서 특정성을 갖는다. 상당수의 보도들도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2. 본론

1) 코로나19 하에서의 난민들의 상황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의 흐름 속에서 난민캠프 및 난민주거시설의 인구밀집도와 열악한 환경(조건)이 난민들의 (감염)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기사들이 한 달 간 꾸준히 보도되었다. 그중에서도 콕스바자르(Cox's Bazar) 지역의 ‘로힝야 난민’들이 처한 ‘곤경’과 관련된 보도들이 주로 관찰되었고, 이와 함께 난민을 비롯한 강제이주민들의 인권보장/획득에 ‘이동에 대한 권리’가 필수(기반)적 권리임을 상기시키는 기사들도 관찰할 수 있었다.

지구적 위기의 상황에서 국내 언론의 국제보도는 의미가 매우 크다. 국제 국면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국내적 문제/상황들에 관한 여러 성찰의 지점들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문제를 다루는 국내보도(특히 난민의 ‘곤경’에 관한 보도)들은 많은 경우 그곳들과 이곳의 연루連累를 담보하지 않은 채 전달되기 때문에, 그곳들의 상황을 그곳들만의 불운으로 인식시킬 가능성을 높인다(이는 의도된 것이기도 의도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즉 이곳을 그곳들과 연계하여 읽지 못할/않을 때, 이곳의 상황은 단지 이곳만의 예외적인 사건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국제보도를 다루는 언론들의 역은 더 많은 사실을 보도하는 것 못지않게, 지구적 사실과 국내적 사실/상황들 사이의 연계 지구적 폭력(조건/구조)의 동형同形·상동相同성에 관한 관찰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관련된 최근의 관찰로는 다음을 참고. 신지영 외, 2020, 난민,난민화되는 삶, 갈무리에 관한 관찰을 보다 ‘활발히’ 작동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지적은 정의로운 보도 혹은 가치/윤리를 중심에 둔 보도에 대한 요구인 것 같지만, 그보다 ‘난민문제’의 더 나은 취재를 위한 전제조건을 상기하는 차원에서 제안된 것이다. 왜냐면 동시대적 난민문제는 ‘비-일국성’/‘전 지구성’을 기본적인 성격으로 담지하고 있고, 이에 따라 한 지역의 난민문제를 취재하더라도 그것이 가진 지구적 성격을 간과하거나, 이것과의 연계를 고려/참조하지 않을 때, 취재는 ‘현상나열’에 머무르거나 진실의 일부만을 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한 요구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미 국제보도와 국내문제들의 연결에 근거한 다수의 난민 관련 ‘정보’들을 갖고 있고, 이들 중 대다수가 난민에 대한 배제의 근거로 사용된 과거를 집합적으로 경험한 바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언론의 난민 관련 국제보도는 더더욱 국내 국면과의 ‘올바른’ 연계를 고려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그곳들을 통해 이곳을/이곳을 통해 그곳들을” 성찰하는 계기 마련의 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6월 국제보도들의 말미에 이런 문구가 기입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시다시피 한국에도 이주민,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 난민들은 코로나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을까요? 향후 언론들의 취재가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2) 시민에 대한 경찰의 인종주의적 범죄와 관련된 언급

시민 조지 플루이드(George Floyd)씨의 죽음 이후, “흑인의 삶도 중요(소중)하다”는 문장과 함께 빠르게 진행된 동료시민들의 공동행동과 사건경위를 보도했다. 이와 함께 언론들은 사건 가해자의 반려자가 내린 이혼결정에 대한 보도를 내놓았는데, 이 과정에서 반려자의 실명 및 그의 난민지위가 공개되었고, 위 정보는 ‘외신’을 (그대로) 옮긴 한국의 언론에도 그대로 보도되었다(조선일보 6.3일자, “흑인 사망케 한 경찰관 아내, 위자료 한 푼도 필요 없으니 이혼해달라”). 더불어 가해자에게 조력한 동료경찰의 실명과 그의 난민지위 관련 배경에 대해 서슴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보도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서울신문 6.5일자, “‘흑인 사망‘ 도운 경관 셋 출두, 소환된 라오스 몽족 슬픈 역사”). 이와 같은 보도들을 통해 우리는 특정 인물의 난민지위 배경이 공개되는 것의 의미에 무지한/혹은 무시하는 한국 언론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전배우자가 스스로 자신의 난민지위 공개를 허락했을 수 있다. 하지만 위 사안은 당사자들의 난민지위 배경과 관계없이 충분히 다뤄질 수 있는 보도였다. 즉 사건 가해자의 전배우자가 내린 이혼결정과 사건 동조자인 그의 경찰동료가 저지른 범죄는 이들의 난민(배경)지위와 어떠한 ‘보도 관련성’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후자의 경우, 그가 난민배경을 가진 민족 출신이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동료경찰의 폭력을 “보다 더욱” 용인/좌시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설령 행위와 출신지위 사이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더라도, 이는 많은 조사를 통한 사실관계를 분명히 따지고 난 이후에나 주장가능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사건과 연루된 이들의 행위는 이들이 가진 난민(배경)지위에 관한 언급 없이 충분히 보도될 수 있었다.

동시대 난민이라는 형상은 무엇보다 박해(의 가능성 및 현재화)와 관련되어 있다. 이에 따라 각국 ‘비호체제regime’의 1차적인 역할/의무는 비호권을 주장하는 시민의 안전을 ‘박해의 여러 가능성’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이다(주지하듯이 시민의 개인정보에 대한 보호는 필수/기본사항이다!). 그런데 언론의 위에서 언급한 보도들과 같은 (‘시민적 무관심’의 실패를 넘어선 적극적인) ‘반/비-시민적 관심’은 ‘비호체제regime’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당사자의 위험 및 불안, ‘박해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언론의 주의가 요청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3) 난민을 주제로 하는 행사에 대한 기사들

세계 난민의 날을 맞이하여 난민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행사들에 대한 보도가 다수 관찰되었다. 대학 연구소 단위의 행사(학술대회)로는 인하대학교 다문화융합연구소와 호남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진행한 ‘초연결사회에서의 다문화 리터러시’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가 진행한 ‘쿰다로 푸는 난민의 출현과 인식’이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들은 2018년 이후의 시간 속에서 ‘난민문제’를 어떻게 성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학계의 고민과 그간 축적된 연구들을 발표한 자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제6회 난민영화제에 대한 보도들도 관찰되었다. 이번 난민영화제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Beyond Distancing”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바 있다. 아래는 난민영화제의 소개 전문이다(길지만 영화제의 취지를 잘 설명하는 글이라 생각되어 전부 인용한다). 난민영화제의 상영작 및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 https://www.koreff.org/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모두가 코로나라는 재난을 통과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같은 수준으로 재난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코로나 이후 선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재난지원 정책과 소수자에 대한 무분별한 언론 보도, 강화된 감시와 인종주의는 난민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권리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 사회적 소외로 이어지는 상황을 목도하며 코로나 이전부터 고립됐던 삶에 대해 묻게 됩니다. 난민이라는 이유로 거리를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 한국 정부에 의한 감시와 신원조회를 일상적으로 감내해왔던 사람들, 언제든지 ‘가짜'로 낙인찍히고 의심받아야 하는 사람들, 자립할 수 없는 대상으로 분류되어 시설에 평생 갇히는 사람들,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질병을 숨기고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아 고립돼야 했던 사람들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요? 코로나19라는 재난은 특정 집단에 대한 낙인과 권리 제한을 통해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 모두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서로의 안전은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미타쿠예 오야신”,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디언의 격언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되찾아야 할 것은 거리두기를 넘어선 연결의 감각일 것입니다. 2020년 제 6회 난민영화제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Beyond Distancing”라는 메세지와 함께 여러분을 만나고자 합니다. 우리는 '모두'의 안전할 권리를 고민하며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재난의 상황에서 거리두기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 격리와 고립이 일상인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영화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이라는 공간이 또 하나의 단절의 이유가 되지 않고, 서로를 연결하고 접속하게 해주는 매개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거리두기를 넘어선 모두의 권리를 향한 연대를 꿈꾸며...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4) 난민 관련 새로운 책 및 보고서의 출간

세계 난민의 날이 있는 6월을 맞이하여 다양한 난민 관련 책들이 출간되었고, 기사로 다루어졌다. 6월에 출간된 책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난민, 난민화되는 삶>,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 <난민 말고 친구>, <난민 친구가 왔어요> 등. 더불어 중요한 실태보고서들의 출간과 이에 관한 보도들도 다수로 이루어졌다. 주목할 만한 보고서는 난민인권네트워크의 <2019년 한국의 공항, 그 경계에 갇힌 난민들- 공항난민 인권침해 사례보고서>와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의 <무지개는 국경을 넘는다. 2탄: 성소수자 난민 심사 과정에서의 인권 보장> 등이다. 두 보고서 모두 현재 한국의 난민비호레짐의 긴급한 과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5) 공항 ‘환승구역’에서의 난민지위 신청

공항 환승구역에서 한 비호권자가 국가로부터 난민지위의 신청을 거부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보도들이 관찰되었다(SBS 6.5일자 등 “인천공항서 넉 달째 생활, 난민심사 길 열렸다”). 이 보도의 취재내용은 한편에서는 그간 반복되어 왔던 ‘공항 내 난민문제’의 ‘추가적인 사례’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난민지위 신청은 모든 시민/인민의 권리이며, 이에 따라 상이한(국가의 출입국관리체계가 승인하기를 꺼리는) 경로(환승객)로 비호권을 주장했다고 하더라도 심사에의 회부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판결이란 점에서 새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물론 이 비호권자는 법무부의 항소에 따라 한동안 이전과 같은 ‘공항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관련하여 관찰자는 이와 같은 보도가 무엇보다 난민과 관련된 상징적인 법질서 시민들에게 모든 법은 “법이기에 정당화되는”, 즉 상징적인 권력/폭력으로서 승인된다. 물론 법의 합리화 경향에 따른 시민들의 동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법을 지탱하는 건 그것의 상징적이고도 폭력적인 속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파스칼). 그리고 국경에 관한 법은 상징질서의 최상위에 속한다(누구도 의심을 품기 쉽지 않다).
에 재고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보도는 법무부와 법원의 상이한 입장을 잘 대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난민법 6조>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다르다. 즉 법무부는 <6조>에 근거하여 비호권자의 난민지위 신청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법원은 동일한 <6조>에 근거해 법무부의 집행에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고 본 것이다. 상징권력(기관)들 사이의 차이와 경합이 드러나는 모습들을 관찰하고/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의 준거(의미)지형은 넓어질 수 있고, 또한 상징폭력/권력으로서의 법/판결에 대한 대항 역시 보다 용이해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언론은 난민에 대한 국가 기관들 내부(더 나아가 지역 정부 사이의, 지역정보와 중앙 정부 사이)의 차이와 경합과정을 보다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후 sbs(6.29일자)는 <인권AS>라는 이름을 건 기획기사에서 위의 보도(6.5일자)를 보다 자세히 다룬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획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으려면 짧은 일회성 기사로는 부족합니다.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겼다는 호소, 그 이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응답했는지 '인권AS' 취재파일로 살펴보겠습니다.” 지켜볼만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6) 허위난민 알선에 대한 기사

6.9일자로 본국의 시민들에게 난민신청을 알선하고, 수익을 얻은 방글라데시 유학생을 구속시켰다는 보도가 다수 관찰되었다(한국경제 “허위 난민신청 알선 방글라데시 출신 유학생 구속”, 조선일보 “유학생→관광객→난민,,자국인 불법 입국시킨 방글라데시인 검거” 등등). 아마도 6월 한 달간 ‘하나의 사건’만으로는 가장 많은 기사가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각 언론사의 기사내용은 거의 모두 동일했다. 그리 길지 않은 기사는 (어떤 말도 보탤 수 없게끔) ‘허위난민’ 신청을 알선한 정황과 시나리오 모두 완벽하게 적혀 있다. 그래서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조금의 첨언을 해보자면, 나는 ‘이민특수조사대’를 그리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며 설령 조사대가 ‘알선자’를 검거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통해 입국한 신청자들의 심사에 대한 권리는 공정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심사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신청자들이 ‘알선자’의 ‘허위 난민신청’가이드를 따랐다고 하더라도 먼저는 이들에 대한 ‘판단지연’을 실천하고, 다음으로 (큰 비용을 지불하면서 알선자와의 접촉을 시도한) 이들의 난민신청(행위)의 동기와 의미를 파악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허위 난민(신청)’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언론에 대해 크게 2가지 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1)언론은 난민 관련 용어의 차이에 좀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물론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하나의 전략인 상황에서 이런 제안이 받아들여질까,,싶긴 하다). 많은 기사들에서 ‘허위난민’과 ‘난민불인정자’는 동의어로 다뤄지고 있다. 이처럼 언론이 중요한 차이들을 묵인하고 이를 기정사실화할 때, 난민불인정의 원인과 책임은 고스란히 난민신청자 개인에게 덧씌워질 수 있다(정부의 심사기준과 심사과정 상의 문제를 짚는 것이 아닌). 그리고 다음과 같은 도식의 사회적 안착을 가능케 할 수도 있다. 불인정자=허위난민). (2)언론은 ‘합리적 선택’이 가능한 존재/상황을 가정한 채로 난민의 행위를 판단하거나, 이에 기반하여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태도를 재고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또 다른 허구(중 하나)는 ‘진술의 일관성’일 것이다. 언론의 난민지위에 놓인 이들의 조건을 보다 입체적으로 관찰하는 실천은 진실에 가까운 보도를 위한 언론의 필요이다.

7) 세계 난민의 날, 보도자료에 대한 응답과 기획기사들

세계 난민의 날을 맞이해 현재 한국사회의 난민인권의 문제들을 성찰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전망하는 기사(단체들의 보도자료에 대한 응답)들이 다수 관찰되었다. 대표적으로는 6.18일자 연합뉴스의 보도를 들 수 있다(“난민인권단체 난민 거부 정책 폐기하고 권리 보장해야”). 보도에 따르면, 난민인권단체들은 현재 비호레짐의 문제들을 성찰하며, 다음과 같은 방향을 제시했다. (1)새로운 난민 인권 정책 수립 (2)국제적 인권 기준에 걸맞은 난민법 개정 (3)국제법에 부합하는 출입국 난민 심사 운영 (4)난민신청자의 장기 구금을 용인하는 현행 제도 개선과 아동 난민의 구금 철폐 (5)난민의 건강권, 사회보장, 노동권, 정보접근권 등 기본권 보장.

이와 관련하여 기존에는 쉽게 관찰되지 않았던 보도들도 관찰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보도는 ‘소수자 난민’과 관련된 취재들이었다(한겨레 6.18일자 “성소수자 박해 피해온 난민에게 “성경험 언제?” 묻는 난민심사”). 기사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기반하여 난민지위를 신청한 시민이 지위심사 과정에서 경험한 일들을 다루었는데,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인권수준’과 ‘난민심사의 수준’ 그리고 ‘난민지위의 인정수준’ 사이의 깊은 상관관계를 관찰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 난민문제 전반에 대한 기획보도로는 아시아경제(6.20일자 “난민혐오 중단 vs 국민이 먼저, 난민수용,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와 중앙일보(6.19일자 “유럽보단 한국, 난민 2만명 몰린다는데, 정부 대비책이 없다”)의 기사가 관찰되었다. 전자와 후자 모두 법무부와 난민인권단체 그리고 난민반대단체들의 입장을 교차시키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후자에 비해 보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입장 차를 다룬다면, 후자는 비중립적으로 법무부의 입장에서 구성을 전개해나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글을 작성하기 위해 만났던 한국의 난민 관련 전문가들은 중앙일보(6.19)의 사진과 아래의 설명을 보며 하나같이 “너무도 놀랍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아래의 중앙일보사진 참고). 왜냐하면 한번이라도 저 공간에 가본 사람들은 알 거라고! 사진 및 그에 대한 설명과 같은 모습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즉 거의 연출에 가깝다는 것이다. 더불어 다음과 같은 언급들을 어떠한 취재도 없이 인용하며,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한 난민심사담당관은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피하려는 목적도 많지만 (난민 인정 사유가 아닌) 경제적 목적으로 한국을 찾는 경우도 많다”며 “법이 인정하는 난민을 골라내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난민 신청 사유가 아닌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 후 도피 목적으로 한국에 온 경우는 난민협약 적용 배제 사유지만 정부는 수년에 걸친 절차를 모두 진행해야 한다”며 “무분별하게 재신청이 가능한 점 등 최소한의 견제 장치 마련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법무부의 입장에서 난민인권을 옹호하는 진영의 주장을 폄하하는 표현들도 서슴지 않는다. 다음의 인용문은 난민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두 지형을 구분한 듯 보이나 실은 두 지형을 ‘동급화’하면서 난민인권의 옹호를 폄하하고 그에 대한 현재 법무부의 난민정책의 우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난민은 아직 낯선 존재다. 낯선 만큼 난민들에 대한 인식도 단편적이다. 경제적 갈등, 사회 불안을 우려하는 강경한 배타주의와 우리 사회의 수용 역량에 대한 현실적 고려 없는 막연한 인도주의로 나뉜다(강조는 인용자).”

결론적으로 중앙일보의 기사는 법무부가 지금까지 견지해온 난민정책의 기조를 긍정하며, 정당화한 측면이 있다. 이는 난민인권단체가 제안한 보도자료의 핵심인 “난민을 거부하는 정책을 폐기하고, 실질적인 난민보호를 위한 난민법을 개정하라”는 주장과 많은 부분 상충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보도로 난민(신청자)들의 노동조건과 실태에 대한 기획기사가 관찰되었다(단비뉴스 6.8일자 “우린 '외국인 노동자' 축에도 못 끼어요”). 이 보도는 난민지위의 특정성에 근거한 차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동현장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관찰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장(한국경제 6월 18일자 “난민은 낯선 존재 아닌 우리 이웃”)과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6월10일자 “유엔난민기구 韓대표, 한국戰 후 큰 성장 韓, 난민에 도움줘야”, UPI뉴스 6.9일자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 입국제한은 난민에 직격탄…망명길 열어줘야”)의 언급을 담은 기사들과 난민분들의 목소리(한겨레 6월17일자 “마스크에 이어 재난지원금도 차별받는 사람들”, 경향신문 6월19일자, “한국 온 지 10년째, 아직도 이방인 같아” '세계 난민의 날' 앞둔 국내 난민 목소리”)와 글이 담긴 보도들도 종종 관찰되곤 했다.

3. 나가며

난민인권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전의 6월들에 비해 올해 6월은 언론들의 난민관련 취재열기가 상당부분 줄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것이 코로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하더라도 다소 적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했던 (쓸모를 모르겠는) 생각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언론의 난민보도가 많은 것이 좋은 걸까? 적은 것이 좋을 걸까? 6월의 관찰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에도 그에 대한 답을 잘 모르겠다. 다만 난민에 대한 불필요한 관심(나는 이걸 위에서 ‘시민적 무관심’에 반하는 ‘반/비-시민적 관심’이라 불렀다)에 근거한 보도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사라져야 한다는 게 내 입장인 것 같다. 왜냐면 부르디외의 말처럼 언론은 시민들에 대해 동원과 강요의 영향력을 갖는데, 이러한 ‘반시민적 관심’에 기반 한 보도들이 그것의 좋은 윤활유가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난민 관련 불필요한 보도(관찰)들은 앞으로도 잘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번쩍 든다. 아마도 이들은 국민주의적 정서에 기반 한 실천 혹은 난민을 통한 여러 이해관계의 전략적 실천들을 경유하며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팀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튼 다른 관찰들을 기다리며, 좀 늦었지만 6월 언론의 난민관찰(보도)에 관한 관찰은 이렇게 마무리 지어볼까 한다.

 

[언론모니터링no.5] 난민혐오대응워킹그룹에서는 매달 난민, 이주민 관련 언론 기사 모니터링을 진행합니다. 6월 모니터링을 공유합니다.
* 작성자: 워킹그룹 소속 박경주(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