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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젠더 박해’를 정치적 망명 사유로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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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박해’를 정치적 망명 사유로 인정하라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하리타



독일에 살고 있는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를 한국 사회에 전하기로 했다. 베를린에 있는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발행한 책자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11편의 이야기를 번역해 소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이주 여성과 난민 여성들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의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 다수가 망명 및 난민 신청자(asylum-seeker) 신분이며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마케도니아 등 분쟁 지역에서 자유와 안전을 찾아 국경을 넘은 이들이다. 두 번째 이야기 “문제는 이동의 자유다”((This is about freedom of movement)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출신의 여성이라는 것 외엔 구체적인 지역과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떠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해보고 더 많은 선택권을 갖기 원했기 때문에. 꼭 독일로 오겠다고 정한 것은 아니었고, 그럴 기회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결혼하기 이전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그 때도 이미 내게 유럽여행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되자 우리 사회의 문화에 따라 가족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했고, 이 제도에 들어감으로써 나는 비로소 여자들이 얼마나 억압당하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 엄마가 결혼에 대해 늘상 해오던 얘기들이 내게는 전혀 말이 안됐었다. 실제로 내가 결혼을 해보니 역시나 그랬다.

우리 엄마의 이야기를 요약해보려 한다. 아니, 우리 할머니에서 시작하겠다. 할머니는 식민치하 영국인들 밑에서 일했고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됐다. 이유는 설명 안 하겠지만, 할아버지는 7년간 구류를 살았다. 할머니 혼자 남아 아이 9명을 책임지게 됐다. 할머니는 살아남아 가족을 부양해냈다.

할아버지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왔을 땐, 아마 7년이나 지나있어서 그런지 더 이상 집에 어울리기 어렵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 사이 할머니는 여성으로서 해방되어 있었다. 모든 결정을 도맡아 하고, 아이들도 혼자 기르는 가장이었으니 할아버지가 별 필요 없게 되었는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혼자 부모 노릇을 다 하느라 애쓰고 산 것을 고마워하는 대신, 새로 가족을 만들고 싶다고 했단다. 할아버지는 얘기는 여기서 끝난다. 우리나라에서 가부장제가 이렇게 작동한다.

이제 엄마 얘기를 해보자. 엄마는 우선 굉장히 부지런한 분이다. 엄마는 독립 이후 수립된 정부에서 무척 중요한 관료였던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에겐 부인이 셋이었다. 물론 정부에서 그렇게 막강한 자리에 있고, 돈도 많고, 게다가 일부다처제라는 아프리카 전통도 있기 때문이었다. 돈이 많을수록 많은 부인을 거느릴 수 있다.

결혼하고 몇 년 뒤, 엄마는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꼈고 아버지에게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건 아버지 뿐 아니라 엄마의 친정 가족과 사회 전체에 반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엄마가 그렇게 잘 나가는 남자를 왜 떠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가족들도 다 반대했다. 우리는 그 때 아직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아버지에겐 엄마의 그런 태도가 남자 자존심에 입을 수 있는 가장 큰 멍이었다. 자존심이 대단한 그에게는 아내 하나가 반항을 하면서 혼자가 되고 싶다고 하고, 결혼은 자기에게 안 맞는다고 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엄마를 모욕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남자로서, 정부 관료로서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동원했다. 예를 들면, 이혼 절차 중에 오가는 문서들에다 아버지는 자기 서명을 넣지 않고 정부 도장을 찍었다. 엄마에게 남편이 아니라 정부에 반하고 있다고 엄포를 놓으려는 것이었다.

내가 우리 엄마를 많이 존경한다고 하면, 그 말은 진심이다. 엄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좋은 교육도 시켜줬다. 우리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잘 살게 해줬는데, 우리는 당시에는 잘 몰랐다. 혼자 부모 두 사람의 역할을 하기 위해 엄마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고 있었는지.

의붓딸을 데리고, 남편을 떠나다

결혼 후 당장 펼쳐진 여러 가지 현실은 처음부터 날 미치게 했다. 나는 이미 아이가 하나 있었던 남자와 결혼해 또 다른 형태의 학대를 마주했다. 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하나 있었다. 나는 아이들 아버지가 너무 무책임해서 두 아이를 모두 돌봐야 했다. 위에 딸아이는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고, 사람들은 의붓아이가 있는 가정을 잘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의붓딸과 관계를 잘 맺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아이를 위해서였다. 애한텐 아무 죄가 없는데,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아이의 삶이 얼마나 망가질지 뻔히 보였다. 내가 책임을 자처해야만 했다. 의붓딸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딸아이는 자기 상황을 잘 몰랐고 친엄마가 누군지도 몰랐다. 나중에 이 결혼을 끝내려고 준비하면서도 나는 의붓딸 곁을 지켰다. 힘든 싸움이었지만 결국 남편을 떠날 수 있었고 딸애는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그 때 의붓딸아이를 데려간 결정의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딸은 사춘기가 되자 아버지와 살겠다고 했다. 그 애가 그때는 잘 몰라서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누나가 배다른 남매인 것을 여태 몰랐던 내 아들은 그 때 진실을 알아버렸고, 남매가 가깝게 지냈던 터라 상처를 크게 받았다. 나는 항상 딸애에게도 충분히 관심을 주려고 했었다. 그 애에겐 나와 우리 친정 가족들 말고는 아무도 없고, 자기 아빠 같이 엉망인 사람 곁에 있다간 그 애 인생도 엉망이 되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돼 버렸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의붓딸에게 ‘네 인생은 네가 스스로 책임져야한다’고 말했다. 아들이 우리 둘 사이에 가운데서 ‘누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라’고 간청해서 딸과 나는 다시 한 번 가까워졌다. 자기 아버지랑 지내는 동안, 그 애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하나 두었다. 그런데 결혼생활이 잘 안되고 지금은 우리 친정 가족들과 살면서 우리 언니와 같이 일한다. 그 딸아이에게 안정된 기반을 만들어주려고 몇 년이나 노력했는데, 이제야 좀 그렇게 되어가는 모양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무책임한 남자 하나가 결혼이란 제도에서 아내와 자식들, 특히 딸들에게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지 나는 경험했다.

이혼하고 친정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나는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고, 이후에는 또 부업을 꾸리면서 아이들한테 필요한 것들을 마련했다. 나는 아주 젊은 이혼녀였고, 내 또래의 기혼 여자들은 나와 무슨 일로도 절대 엮이지 않으려 했다. 내가 자기들 남편을 채갈까 봐 두려워서였다.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혼하고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회의 다른 어려움에 직면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들의 반응은 그냥 무시했다. 일하는 싱글맘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빠서 거기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내가 우리 아이들을 양쪽 부모가 다 있는 애들이나 다닐 수 있는 그런 학교에 자랑스레 보내게 됐다. 학교 행사 때 학부모로 만나면, 그때 그 여자들이 나를 존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우리가 급이 같아졌으니 말이다. 나는 싱글이었지만 내가 우리 아이들을 남편의 도움 없이 자기 애들과 같은 학교에 보냈다는 것을, 그 사람들도 부정하지 못했다. 나는 수치심에서 자신감과 존중으로, 상황을 역전시켰다. 나중에 그 여자들도 이혼하게 되자 상황은 더 변했다. 다들 나한테 도움을 청하러 왔다. 내가 어떻게 이혼하고도 잘 살아왔는지 물었다. 결국엔 내가 그들의 레퍼런스(참고자료)가 된 것이다.

나는 다른 여자들에게 서로 서로 터놓고 대화하라고 조언한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끝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가부장제를 믿지 말라고 한다. 왜냐면 우리 여자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힘을 충분히 갖고 있고, 우리가 뭘 하건 무엇이 필요하건 결국엔 다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기사의 원문 ‘문제는 이동의 자유다’(This is about freedom of movement)가 시작되는 페이지.

날개 단 물고기들이 하늘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이미지다.

(출처: <우리 자신의 언어로> 국제여성공간, 2015)



독일인들은 인종차별에 대해 무지하다

자유에 관해서라면, 뭔가가 나를 유럽으로 이끌었다. 유럽에서는 여자들이 굉장히 자유로우니, 내가 보아온 억압 없이 나도 그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가끔 스스로가 겁쟁이처럼 느껴진다. 모국에 남아 거기서 싸웠어야 했는데. 여기에 오고 나서 나는 다른 어려움들을 겪는다. 이를테면 인종차별. 나는 독일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이 그 사람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임을 알지만, 사실이 그렇다. 독일인들이 이를 인정하고, 자기들이 가진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영영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내 일상 생활이 어떤지 얘기해보자. 독일 사람들은 흑인 여성인 내가 영주권을 얻거나 성노동을 하는 것 외에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교모임 같은 곳에서도 그런 강박이 심각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이유로 내가 유럽에 왔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한다. 내게는 그런 결정을 할 능력이 없다고 여기나보다. 그 사람들에게 나는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피난와야만 했던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한 여자로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유럽에 이끌렸다는 것이 그들에겐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소위 말하는 ‘교육 잘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러한 무지를 마주하는 것은 무척 성가시다. 마치 어느 정도까지만 머리가 돌아가다 수면모드가 되어버려서 나머지는 무지가 꽉 채우고 있는 듯이, 그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사람들이 ‘독일에서 뭐하러 왔냐’고 묻는 질문도 짜증난다. 그들은 “왜 여기 있어요?”(Why are you here) 라고 한다. 무슨 이런 질문이 다 있담? 화장실에서 음식접시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말은, 내가 화장실에서 접시를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내게 왜 여기서 먹냐고 묻는 것을 이해하겠지만, 유럽에서 뭘 하고 있냐고 묻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 있고 그게 다다.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때로 사람들은 결혼하고 여기 왔냐고 묻기도 하는데, 남자가 돈을 내줘서 왔을 거라는 생각을 암시한다. 아프리카 여성이 독립적으로 여기 오진 않았을 거라 굳게 믿는 것이다. 데이트가 성사될 만한 모임에서는 내가 (독일 남성을 만나) 영주권 얻을 방법을 찾고 있다고 으레 짐작한다. 사람들은 내게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냐고 묻기도 하는데, 내가 이미 자식이 있다고 했을 때 한 남자는 그랬다. “잘됐네요. 난 이미 정관수술 했거든요.” 정관수술이 에이즈 같은 성병을 예방해주기라도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럴 때 나는 그 사람에게 아프리카에 대해 뭘 아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따뜻한 날씨와 사파리를 즐기고 싶다고 얘기한다. 아프리카엔 좋은 날씨, 동물, 야생 이런 것 밖에 없고, 인간이 내내 거기 어우러져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길을 가다 보면 사자를 만나고, 그 사자가 길을 건널 때까지 기다리는 그런 모습이 머릿속에 있나보다. 한번은 베를린에서 독일 남부로 가는 길에 운전기사가 내게 아프리카에도 도로가 있냐고 물었다. 아니 무슨 질문이 그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물정을 모르나. 여기서 대체 어떤 교육을 받길래.

또 한 번은 우리나라에서 테러 공격이 일어나서 뉴스에 떠들썩하게 났다.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일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당시 같은 아파트에 살던 독일 친구가 진지하게 말하길 “독일 소방수들이 거기까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불 끄러 갔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 귀를 의심했다. 그에게는 그게 공상과학 영화 같았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면서 사람이 어쩜 저리 멍청할 수가 있나 생각했다. 사람들이 짐작이라도 좀 제대로 할 수 있게, 독일 교육 시스템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독일 사람들, 정말 우습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내게도 평범한 여자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랑과 공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망명 신청자’라는 나의 상황과, 이 과정에서 내가 그들에게 뭔가를 부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틀렸다. 나는 내 힘으로 여기 왔고, 경비도 스스로 지불했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다. 남자를 찾는 게 내 목적이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나의 발전에 집중한다. 물론 이 와중에 파트너가 있다면 위안이 되고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주된 관심사는 분명 아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한 편견이 이렇게 크니, 내가 누군가를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같은 눈높이에서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까지 말이다.

독일대사관이 준 ‘불법’ 비자로 망명하다

독일로 오게 된 나의 여정에 대해 말하자면, 언급했듯이 구체적으로 독일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서류 처리를 맡긴 에이전트가 우리나라에 있는 독일 대사관에 연락한 것뿐이다. 나같은 사람에게 비자를 주면서 뒷돈을 챙길 의향이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 서류를 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이들 한다. 유럽에서 사람들은 밀수업자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 때 밀입국 전문업자라면서 나오는 얼굴은 아랍인이나 아프리카인이다. 하지만 실상은 카르텔이다. 유럽인들도 연루되어 있는 카르텔. 유럽 사람들도 다 관련이 되어 있다.

현재 상황을 보자. 대다수의 아프리카 국민들에게는 비행기 표를 사서 관광객으로 유럽에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관광 비자를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천국에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럽에 오고 싶은 사람들에겐 선택지가 별로 없다. 유럽의 현지 대사관들에서 발급되는 진짜 비자를 받되 ‘불법’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여기 오게 되면 며칠 내로 비자가 만료되고 그 때 망명 신청을 한다. 이게 한 가지 방법인데, 수백 만 원을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싸지 않다. 밀수업자에게 돈을 내는 방법도 있는데, 이 역시 비싸다.

나는 지금 많이들 쓰는 일반적인 방법을 얘기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난민이 유럽에 들어왔다. 유럽의 출입국 관청들이 모를 것 같은가? 그들도 다 연루되어 있는 일이라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러니 문제는 ‘이동의 자유’다. 이 사회에서 누구에게는 이동권이 보장되어 있고 누구에겐 없는지.

정치적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망명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거기에 대해선 나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아니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은 성별을 이유로 한 박해, 젠더 박해가 수많은 여성들에게 모국을 떠나야할 정치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가부장제가 우리를 죽이려한다는 것, 숨막혀 죽지 않으려면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 사회시스템이라는 이름 아래 학대당하고 죽임당하는 삶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여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유럽에서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면 그 어떤 법도 국경의 군대도 우리가 여기 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 오고야 말것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머물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떠나야만 할 시점이 왔었다. 우리 가족의 여자들, 내 주변의 여자들, 우리에게 걸린 저주를 깨버려야 할 때가 왔었다. 우리 엄마나 할머니와는 다르게 살기 위해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좀 다른 것을 주고 키우기 위해서 말이다. 내게는 이것이 정치화해야할 문제다. 빈곤이나 돈, 사회적 지위나 계급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이걸 알아야한다. 여기 온 여자들 중 어떤 이들은 모국에서보다 훨씬 검소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인간으로서의 자유, 여성으로서의 권리와 그에 따르는 기쁨과 자유다. 우리는 모든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싸워야한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북아메리카의 모든 여성들이 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함께 전략을 모색하고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상상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고 그 꿈을 함께 이뤄갈 것이다.

‘성별로 인한 박해’ 역시 망명 사유로 인정해야 한다

유럽인들이 인종차별주의를 거두고 인종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공통으로 닥친 문제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관찰한 바로 독일은 독일 국적의 흑인 여성들의 정체성 문제도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흑인 독일여성들은 거의 매일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파란 눈의 백인 여성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태어난 유럽인인데도. 이게 인종차별적인 질문이 아니면 뭐겠나?

우리 여성들은 ‘성별로 인한 박해’ 역시 망명 사유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 문제가 제대로 다뤄지길 원한다. 많은 여성들이 자기 문제를 공론화하기 두려워 한다는 것을 안다. 극복해야할 지점이다. 우리는 첫 번째, 두 번째 변화의 신호탄으로 나서길 두려워해선 안 된다. 앞으로의 안녕을 위해 정말 중요하다. 서로 대화하면서 각자 어떤 박해를 받았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전에 한 독일 여성이 여성성기 훼손(female genital mutilation; FGM)에 대해 얘기하면서 공포에 떠는 것을 본 적 있다. 물론 끔찍하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상기시켜줘야 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선 한참 어린 여자애들이 여리고 순수한 그 몸에 성기절단을 당하고 있다고. 반면, 이곳 독일에서는 수천 명의 여성들이 예뻐지려고,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자기 몸을 절단하고 있다. 가슴을 잘라 확대술을 받고, 나이들길 거부하면서 여기저기 실리콘을 넣는다. 상류층에선 지방흡입술이 패션인데, 입술에도 받는다. 질을 좁게 만들려고 수술을 받는다. 이게 다 뭔가? 이것도 훼손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기 몸을 혐오하고 다른 여성들을 시기하며 서로 경쟁한다. 스스로에게 자율적, 자발적으로 행하는 가장 큰 형태의 폭력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돈도 많이 들인다.



사진  이 기사의 화자는 미용 목적의 성형수술과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는 

여성성기 훼손 관습이 맥락은 다르지만, 여성혐오와 억압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주장한다. 

여성성기 훼손의 4가지 형태를 설명하는 도표 위(출처: unitewomen.org)와, 

지방흡입술을 안내하는 성형외과 일러스트 아래(출처: profilecosmeticsurgery.com)




여성성기 훼손 문제로 돌아가자면, 그건 강제로 당하는 것이다. 그런 고문에 더해 조혼도 강요받는다. 조혼은,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아이를 낳지 않고도 존중받을 수 있는 자유 없이 한 남자와 그 남자의 가족에게 완전히 종속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가 여성의 자리를 멋대로 지정할 수 있다는 이러한 믿음, 이러한 문화를 쳐부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 여성들이 질병과 빈곤, 온갖 학대, 국가적 재난, 독재와 가부장제에서 생존해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극복했고 그렇기에 스스로를 그냥 꺾이게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힘은 이러한 생존 경험들에서 만들어졌다. 이 힘이 우리 공동의 싸움에 기반을 만드는 데도 쓰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다. 나는 이 인터뷰를 하면서 내 몫을 하고 있다. 내가 살면서 배운 것들을 나눠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


[번역자 노트] 난민여성이 고발한 유럽의 편견, 위선, 탐욕!

이 언니, 쎄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당당한 선언들인가! “불행한 결혼을 끝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우리 여자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충분히 가졌다”, “젠더 박해도 정치적 망명으로 인정하라!” 그녀의 말에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급진적인 생각도 담겼다. “그 어떤 법도 국경의 군대도 우리가 여기 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 오고야 말 것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머물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에서, 나는 위선적인 현 시스템에 대한 한 아프리카 여성의 엄청난 분노와 비판을 느낀다.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 혹은 안전과 풍요가 보장된 지역과 전쟁과 빈곤이 창궐하는 지역이라는 불균형의 원인은 애당초 지금 잘사는 나라들의 식민제국주의 침략이 주된 것이다. 지금도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이라는 다른 얼굴로 착취는 계속되고 있다. 남의 삶의 터전을 지옥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살기 좋은 곳’을 찾는 이주민과 난민들을 살벌한 국경수비대로 막아서면서, 한편으로 규정을 완화하네 마네 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사기극 아니겠는가. 법도 군대도 소용없다고 외칠만하다.

스스로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 왔다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는 삶의 욕구들을 가졌다고 거듭 말하는 화자의 모습은 ‘경제적 난민’(economic refugee)이라는 개념과 이를 둘러싼 논쟁을 떠올리게도 한다. 경제적 난민은 자국에서 빈곤을 벗어나기 어려워 더 나은 삶의 질과 고용 기회를 찾아 떠나온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치적 박해나 재난 등 생명의 위협 때문에 떠나온 난민과 구별해 쓴다. 시리아 내전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경제적 난민으로 분류되는 망명 신청자들이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었고, 지금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문제는 이 개념에 회색지대가 존재하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에서는 ‘경제적 난민=위급하지 않는 케이스’라는 사회적, 제도적 인식이 있어서 신청 당사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빈곤이나 삶의 질은 상대적,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개인에게는 어떻든 다 무거운 불행이다. 게다가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왔다 한들, 이들은 가진 자원이 부족한 낯선 이방인으로서 갖은 어려움에 시달리는, 여전한 사회적 약자이다. 때문에 굳이 ‘경제적 난민’이란 별개의 이름표를 써야 되냐는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그간 한국 사람들과 독일의 난민 문제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반응이 대체로 한결같았다. “난민도 그렇게 많이 받아들이고 역시 독일은 대단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독일에서 난민 수용에 비우호적인 정당들의 적대적, 인종차별주의적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난민 수용에 우호적인 좌파 정당들도 유권자를 설득하는 논리는 ‘장차 독일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 아이를 많이 낳는 문화권 출신의 난민들이 많으니 이는 독일의 출산율과 인구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 전망하는데, 수치는 벌써 올라가기 시작했다. 인구 증가는 마을과 도시 규모가 커지고 건설 경기가 부양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독일의 문화다양성이 높아져 더욱 글로벌한 나라가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 말대로라면, 난민들이 독일에 정착해 바라던 대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건 훈훈한 휴머니즘의 결실이 아니라 그들이 이 사회 번영에 기여한 대가이다. 편견이나 차별 말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지난 3회차 번역자 노트에서 나는 ‘합법적인 이주는 아예 불가능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라 아주 곤혹스러웠다. 이번 이야기를 통해 그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 찾은 것 같다. 우리가 그간 미디어를 통해 보아온 것은 폭탄테러로 집과 차를 잃거나, 지진으로 온통 물바다가 되어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 다음 장면은 남녀노소가 위험천만한 보트항해 끝에 유럽 해안에 닿아 기다리던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이다.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화면이 보여주지 않는 대다수의 사연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또렷한 증언을 통해 새로 알게 된 것이다. 난민이 떠난 나라와 들어온 나라의 관료들, 그리고 백인 유럽인 브로커간의 은밀한 합작으로 이루어지는 피난이 많다는 것을.

합법적인 이주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불법을 일부 동원한 이주나 밀입국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모순. 이주에 필요한 경제력이 있는 사람도 이미 고착된 암시장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상황. 부패한 파란 눈의 관료와 검은 피부의 에이전트가 뒷주머니를 불리며 서류를 써준다. 금발의 국경 관리인은 짐짓 모른 체하며 뒷문을 슬쩍 연다. 생존과 번영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 몸짓을 이용해먹는 탐욕의 카르텔이 있는 한, 합법적인 이주 경로가 마련되기는 요원하다.

헬조선의 28세 청년이 1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독일에 오려면 300만 원 정도가 수중에 있어야 한다. 땀 흘려 일해 350만원을 모은 소말리아 청년은 고작 10일짜리 비자를 사는데 그 돈을 다 쓴다. 한 사람은 문화교류자로서 스타벅스에 취직하고, 다른 한 사람은 외국인청에 줄을 서서 망명 신청서를 작성한다. 두 사람이 답답한 현실을 바꾸고자 들여야 했던 돈의 액수는 엇비슷해도, 새로운 시공간에 도착해 마주하는 ‘인간적 존엄’이라는 시험 난이도는 너무도 다를 것이다.

흑인 여성이자 난민인 화자는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편견과 무지로 자신을 대한다고 얘기한다. 그녀가 ‘명백한 외국인’으로 지목되는 흑인이 아니었다면 좀 달랐을까. 사람들은 그녀를 산전수전 다 겪은 강인한 이혼녀, 엄마, 제 나이보다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여성으로 대할까. 주말엔 달달한 데이트도 하고 월급날엔 근사한 외식을 하고픈 평범한 사람이라 여길까. 나는 그녀에게 말 건네고 싶다.

‘나 알아요, 그 기분. 저도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어요. 주말에 친구 집들이를 갔는데요, 절 처음 본 친구 오빠가 대뜸 그러대요. 니 하오마. 불고기. 동계 올림픽 어때? 북한이랑 통일이 되면 좋겠니? 그 때 우리는 다 같이 둘러앉아 창밖에 보이는 겨우살이 식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1박 2일을 함께 보내던 그 시간, 공통의 화제는 많았지만 그 사람 눈에 나는 그저 외국인이었던 거죠. 나도 언니처럼 그런 질문을 되게 싫어해요. Where are you from? Why did you come to Germany? Are you a student? 그럼 나는 일부러 이렇게 답하죠. 아, 프라이부르크라고, 검은 숲에서 왔어요. 아뇨, 전 학생 아니고 일하는데요. 만약 우리가 어디선가 우연히 만났는데 내가 언니인 줄 모르고 무심코 그런 질문들을 해버린다면, 바로 말해줄래요? 그런 바보 같은 질문 하지 마. 차라리 날씨 얘길 합시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 저널리스트, 액티비스트이다. 2014년 독일로 이주해 환경 거버넌스 석사과정을 밟았고, 남부 도시 프라이부르크에 산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ildaro.com)’에 번역 프로젝트 <우리 자신의 언어로 - 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와 인터뷰 시리즈 <하리타의 월경 만남>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성폭력 트라우마 치유 경험과 섹슈얼리티 해방의 여정을 기록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 - 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가 있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라는 뜻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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