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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한국서 거리 떠도는 난민들

한국서 거리 떠도는 난민들
“목숨 지키려 수천㎞ 왔는데…이젠 제3국으로도 못갈 처지”

자격 문턱 높고 심사 몇년씩 걸려
인정비율 6% 불과…선진국은 30%
심사 대기중 여권 만료 ‘국제 미아’

국내 700명 이상이 불법체류 신세
지난해 난민법 제정불구 효과 없어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8558.html




오늘도 잘 곳이 걱정이다. 유엔이 2000년 제정해 2001년부터 기념하고 있는 ‘세계 난민의 날’(6월20일)을 맞았지만, 미렘베(가명·39)의 처지는 노숙인이나 다름없다. 친구 집에 얹혀 자는 것도 집주인 눈치 때문에 더는 못할 일이다. 주머니를 뒤지면 천원짜리 몇장이 전부다. 목숨을 지키려 수천㎞를 떠나왔어도 미렘베는 매일 목숨 걱정이다.

인도양을 건넌 일을 아주 후회하진 않는다. 고국 우간다는 1986년부터 기나긴 내전을 치르고 있다. 인구 3200만명 가운데 최소 3만명이 목숨을 잃고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미렘베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반군에 가담했다고 오해받고 있었다. 2006년 2월 우간다를 탈출하기 직전, 아내가 자취 없이 사라졌다. 누군가 아내를 살해했다고 미렘베는 믿는다. “그날 떠나지 않았다면 다음은 내 차례였을 것”이라 말하는 미렘베의 검은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그해 미렘베는 학생 비자를 발급받아 급히 한국에 왔다. 선교사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해 알게 됐다. 난민지위를 신청할 때 다른 욕심은 없었다. 그저 ‘보호’받고 싶었다. 유명 대기업이 많은 한국은 그럴 만한 나라라고 미렘베는 생각했다. 그가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한국 정부는 무려 3년에 걸쳐 난민 자격 심사를 벌였다.


처음엔 버틸 만했다. 난민 신청자는 최종 심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인도적 체류’ 차원에서 기타(G-1) 체류 자격을 받는다. 한국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었지만, 체류비자가 발급된 기간 동안 미렘베는 경기도 안산의 자동차공장에서 시간제로 일하며 쪽방에서 살았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전공을 살려 영어 교사가 되겠다는 꿈도 키웠다.


그의 ‘기타 체류 비자’는 2009년 난민 심사에서 최종 탈락하면서 효력을 잃었다. 법무부는 “본국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정치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미렘베의 신청을 기각했다. 이후 작은 짐가방 하나만 들고 그날그날 몸 누일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 비자도 없는 난민에게 일거리를 줄 공장주는 없으므로 딱히 벌이도 없다.


벌이 없는 생활은 단순하다. 난민생활 중 알게 된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거나 어쩌다 생긴 푼돈을 들여 피시방에서 잠을 청한다. 그마저 여의치 않아 공원이나 거리 구석에서 잠든 날도 헤아릴 수 없다.


미렘베의 ‘국제 미아’ 생활은 벌써 3년째다. 지난해 말 법무부의 난민지위 불허 결정에 대해 제기한 행정소송마저 기각당했다. 생명과 생활을 보호받으려 찾아온 한국에서 그는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우간다 정부가 발행한 여권 기간이 만료됐으므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도 없다. 한국에 머무르는 한 ‘불법체류자’ 신세를 피할 수 없다.


오직 남은 길은 주한 우간다대사관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간다에 돌아가면 반군에 가담하는 것 외엔 살길이 없다”고 말하는 미렘베의 눈빛에 절박함이 내비쳤다. 먹고살려면 반군에라도 가담해 총을 들어야 하지만, 반군이건 아니건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다.


미렘베처럼 국제 미아 신세가 된 국내 난민이 최소 700명은 넘을 것으로 난민인권센터는 추산하고 있다. 난민 심사 기간이 지나치게 긴 탓이 크다. 몇년 동안 심사를 기다리다 탈락한 난민 신청자들은 본국의 여권기한 만료 등으로 다른 나라로 망명할 기회 자체를 잃어버린다. 법무부의 난민 심사 기간만 1년6개월~2년 정도가 소요되고, 이후 행정소송 기간까지 합치면 5년을 훌쩍 넘긴다. 난민 심사 기간이 긴 것은 인력 부족 때문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담당 직원은 8명에 지나지 않지만 난민 처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공유되지 않아 무작정 인력을 늘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난민 자격을 인정받는 경우도 여전히 극소수다. 난민인권센터의 김성인 사무국장은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 비율은 국제적 기준에 견줘 터무니없이 낮고 인정 기준도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법무부의 연도별 난민 현황을 보면, 1992년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한 이래 현재까지(2012년 5월) 난민 신청자 4516명 가운데 294명의 난민지위가 인정됐다. 난민 100명 중 6명꼴이다. 난민 인정 비율이 30%를 웃도는 대다수 선진국에 견줘 한참 뒤처진다. 인구 대비 난민 비율로 봐도 독일(0.72%), 영국(0.43%)은 물론 헝가리(0.06%), 멕시코(0.0011%)보다 한참 모자란 0.0005%에 불과하다.


지난해 말 ‘난민 등의 지위와 처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그나마 진전을 이뤘지만, 아직 실효를 발휘하진 못하고 있다. 김 사무국장은 “난민 지원의 법적 기반은 마련했지만, 법무부가 후속 대책을 논의하지 않아 난민 신청자들이 여전히 최소한의 인권을 유지할 생활기반 없이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