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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20세기 소년] 소외로부터 비롯된 절규

#1.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 이야기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어린이들은 밖에 나가 친구들과 뛰놀며 우정을 쌓았다. "밥 먹으러 들어오라"던 엄마의 외침이 왜 그리도 싫었던지 모르겠던 그 시절이 기억나실 것 같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어서 심심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시간가는 줄 몰랐을 것 같다. 얼음땡, 숨바꼭질,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등 놀거리가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모험을 좋아하는 친구였다면 으쓱한 골목에서 숨바꼭질을 하면서 안잡혀보겠다고 살금살금 숨어다니기도 했고, 가까운 곳에 습지나 풀밭, 개천이 있던 곳이라면 송사리라도 잡아보겠다고 물을 흠뻑 묻히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 손에 잡힌 잠자리들은 결국 죽어버렸다는 것은 기억하시는지?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랄 뿐이다.


그뿐이 아니다. 학교 어딘가에는 귀신이 있다는 이야기가 우리를 무섭게 했다. 가서는 안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도 떠돌아다녔다. 


지금 돌아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들이지만, 그 시절에는 정말 무서웠다. 그렇게 우리는 추억을 먹어가며 나이를 채워왔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아가는 것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 친해지고 결국 친구가 된다.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있고, 따돌리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기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 하나와 말 하나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있다. 그 마음아픔이 깊은 상처가 됐다면 원한이 되기도 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대작만화 <20세기 소년>(결말 부분을 담은 후속편은 <21세기 소년>, 이하 통칭 <20세기 소년>) 은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악몽'으로 엮어나간다. 만화 마니아라면 한번쯤 읽었을 <20세기 소년>이 우리에게는 어떤 전환점으로 와닿는 것일까?


#2. 악몽으로 실현된 어린 날의 '예언의 서'


어린이들은 엉뚱한 상상을 즐겨한다. 심형래와 김정식 등의 개그맨들이 출연한 과거 우리 어린이 영화들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엉뚱한 상상을 고전동화와 연결시켜 영화로 풀어 이야기했다. 일본에서는 어린이의 엉뚱한 상상과 어른의 구미에 맞는 줄거리 구조를 연결시킨 '특수촬영물(흔히 특촬물이라고 한다)'이 장르로 굳어졌다. 스티븐 스필버그도 <E.T>를 연출하면서, 상상력과 감정이 풍부한 어린이배우들의 연기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있는 그대로의 반응을 카메라에 담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20세기 소년>도 그렇게 시작한다. 지구를 지키고 싶었고, 지구를 노리는 악당을 물리치고 싶었던 꿈 많은 어린이들은 그 꿈을 풀어내기 위해 '예언의 서'를 쓴다. 누가 무엇을 통해 어떻게 지구를 뒤흔들고 지배하는지, 모두의 의견이 모이고 모여 '예언의 서'가 완성된다. 

1. 악의 조직이 세균병기로 샌프란시스코와 런던, 오사카와 하네다 공항을 습격한다.

2. 2000년 12월 31일에는 도쿄에서 원자력 거대 로봇이 솟아오르며 세균을 살포하고 지구 곳곳을 파괴하고 멸망시킨다.

3. 악의 조직은 세계를 지배한다.


선악 개념이 분명해 악을 물리치는 선의 멋진 모습을 기대하는 어린 아이들의 상상에 맞는 스케일 큰 상상들이다. 문제는 30년이 지나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3. '친구'의 우정 강박관념


그리하여 세계는 위기를 맞았다. 일본에서는 '친구'라는 정체불명의 가면쓴 인물이 나타나 독재정치를 시작한다. 그가 쓰는 정체불명의 가면에는 30년 전 그 어린이들이 고안해 낸 괴상한 그림이 그려졌다. 소년만화 월간지 <소년 선데이>의 "다음 장을 넘기라"는 의미의 손가락 표시와 동그란 눈 모양을 합친 모양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예언의 서'의 내용을 하나하나 현실화하면서 마침내 1인자가 된 것이다. 


친구가 만든 세상은 실베스타 스탤론 주연의 영화 <데몰리션 맨>을 연상시킨다. <데몰리션 맨>은 극단적인 도덕을 내세운 '콕토'라는 사람이 주도하는 독재정치를 그려나갔다. <20세기 소년>에서 '친구'가 지배하는 세상도 그와 비슷하다. 우정과 관계를 중시하는 신흥종교로부터 시작해 우민당이라는 정당조직을 곁들여 일본을 지배하는 '친구'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절교'를 사용한다. 그의 입에서 '절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처형당한다. 


<20세기 소년>은 어린이들의 엉뚱한 상상력으로부터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 배경의 독일과 프랑스를 연상시키는 역사적 배경까지 활용하며 규모를 확대한다. 어린 날의 상상이 모인 '예언의 서'가 세계를 뒤흔들며 위기로 몰고 가자 책임감을 느낀 그 시절의 친구들이 다시 모여 '친구'에 저항한다는 것은 레지스탕스 집단을 연상시킨다. 일본의 사무라이극이나 미국의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인문학적 배경을 이야기로 활용했고,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암시와 복선 위주의 이야기 구조가 전개되면서, <20세기 소년>은 걸작으로 남을 조건들을 갖춰나간다. 줄거리로만 봤을 때는 황당함으로 다가올 여지는 있지만, 이런 조건들이 <20세기 소년>을 풍성하게 꾸며나간다. 장면 배치와 화면 분할 등도 독자의 호흡을 서스펜스 스릴러 방식에 맞게 조율해나간다. 


#4. 소외로부터 비롯된 절규


<20세기 소년>은 독자에게 다양한 숙제를 내준다. 그 시절 '예언의서'를 썼던 무리들 중에서 과연 '친구'가 누구냐는 의문으로부터 누가 '친구'를 돕느냐는 의문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숙제를 내준다.  하지만 거시적인 의문이 있다. 무엇이 '친구'를 괴물로 만들었냐는 것이다. 


<20세기 소년>과 <올드보이>(박찬욱 감독의 영화로 유명하지만 원작은 일본만화다)는 같은 주제를 안고 있다. 바로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오해다. 사람은 제각각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때때로 서로를 오해한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오해와 사소한 잘못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라고 했던가. 


두 작품을 관통하는 코드가 보인다.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누군가가 소외될 수도 있는 것. 두 작품은 소외된 자의 반란을 그린 것이다. 소외된 자가 결국 그 오해를 풀지 못하고 뒤틀린 감정을 잊지 못한 채 엄청난 선택을 했을 때, 세상은 큰 댓가를 치룰 수도 있다.





<올드보이>에는 가두는 자와 갇히는 자가 있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오해 속에서 두 사람은 갑자기 역활이 뒤바뀐다. <20세기 소년>에서는 소외된 자가 힘을 길러 뒤틀린 욕망을 대규모로 드러내면서 친구들의 관계를 주도하던 사람들이 소수의 저항자로 남는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딱히 나눌 수는 없다. 관계가 어긋나 큰 오해를 불렀을 때,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소외로부터 비롯된 절규라고 할 만하다. 소외된 자는 자신의 폭주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고, 관계가 역전된 소외한 자는 이번에는 그 자신이 피해자가 돼 억압의 테두리에서 빠져나가고자 허우적거린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죄수의 딜레마'다. 서로가 협력하면 보다 좋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자신의 생각만 앞세웠을 때 결국 더욱 불리한 결과가 만들어진다. <20세기 소년>에서는 그 결과가 '친구'의 독재와 인류의 위험으로 드러났다. 제로섬 게임이었다.


#5. 불신과 오해가 '난민'을 만든다


불신과 오해, 대화 단절은 반드시 박해를 만든다.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 강자가 약자를 탄압하고, 약자는 선택의 여지 없이 큰 용기를 내어 먼 곳으로 도망가야 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다. 그 약자를 우리는 '난민'이라고 한다. '난민'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늘 비슷하다. 오해와 불신, 대화 단절, 소수에 대한 몰이해 등 공통의 관념이나 관습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폭력이지만, 다수를 형성하는 집단이 그것을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할 때 일어난다. 


<20세기 소년>은 "무관심도 폭력"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감정의 골이 깊어졌을 때, 약자도 거칠게 반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결과는 제로섬 게임이다. 제로섬 게임에 가지 않길 바란다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폭 넓은 대화가 필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꿈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니던가. 그것을 믿고 꿈 같은 이야기라도 한번쯤 믿고 밀어붙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되, 불가능한 꿈을 꾸라고 했던가. <20세기 소년>의 씁쓸함은 한편으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또다른 꿈을 시작한다. 오해와 불신의 벽이 허물어지고, 사람들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대화하면서, 바로 이 세상에서 '난민'이라는 사람들이 먼 역사 속 존재가 되길 바라는 꿈이다. 



(박형준 활동가 작성)